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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기도하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16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진행한 수요 일반알현에서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갔다. 교황은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에게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는 어머니와도 같으신 분이시라고 강조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 5. “아빠, 아버지!”

“아이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을 계속 이어갑시다. 오늘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기도란 본질적으로 ‘아빠, 아버지’라는 오직 한 단어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서 교리 교육을 시작합시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한 대목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또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모든 새로움을 응축하는 동일한 기원이 두 번씩이나 반복됩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설교를 듣고 난 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두려움의 대상인 폭군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마음속에서 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를 “아버지”로 부르면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 그대로 유지됩니다. “아빠(Abbà)”

신약 성경에서 아람어 표현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아람어 단어들 안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기록 된” 것처럼 남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단어들은 예수님의 언어를 존중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첫 번째 단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기도의 근본적 새로움을 즉시 발견합니다.

이는 단순히 하느님의 신비에 연결되는 상징, 이 경우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과 연결된 상징을 사용하는 문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말하자면, 각자의 마음 안에 쏟아 부어진 예수님의 온 세상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작업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기도”를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빠”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단순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훨씬 친밀하고 더 감동적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원래의 아람어인 “아빠(Abbà)”를 “빠빠(Papà)” 혹은 “밥보(Babbo)”로 번역 할 것을 제안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신에 “빠빠”나 “밥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아버지”로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빠빠”라고 부르며, 아이가 아버지에게 “빠빠” 혹은 “밥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느님과 관계를 갖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사실상, 이 표현들은 애정과 따뜻함을 불러 일으키며, 우리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품 안에 완전히 빠져들어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애정을 느끼는 어린 아이의 이미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이유로,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린이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마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기도를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빠빠의, 밥보의 품 안에 있는 어린 아이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단어의 의미를 우리에게 더 잘 소개해주는 것은 복음서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컨대 루카 복음(루카 15,11-32)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읽은 후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면 “주님의 기도”는 다채로운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렸으며, 자신이 했던 서운한 말을 기억하지 않고, 자신을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포옹을 받은 후 그 방탕한 아들이 이 “주님의 기도”를 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들이 어떻게 생명과 힘을 얻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이렇게 물어봅시다. 하느님 당신께 있어서 오직 사랑만을 아신다는 게 가능한가? 하느님은 증오를 모르시는가? 네, 하느님께서는 “나는 사랑만 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한 복수나 정의에 대한 주장, 그리고 분노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랑만 알고 있단다.”

이 비유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음을 연상케 하는 무언가를 하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특히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아무런 자격이 없는 경우에도 자식들을 위해 변명하고, 자식들을 감싸 안으며, 자식들을 향한 공감을 멈추지 않으며,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기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아빠라는 이 하나의 표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 다른 방법이 아닌 이와 똑같은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 안에 다른 모든 나머지 기도들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찾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비록 여러분이 여러분의 모든 재능을 헛되게 낭비했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안의 아름다움을 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에게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는 어머니와도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히 지속되는 “임신”의 상태 속에 있는 셈입니다. 육체적 임신은 아홉 달이면 충분하지만, 이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순환을 만드는 (영원한) 임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란, 그저 “아빠”, “빠빠”, “밥보”,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신뢰를 지닌 채로 말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세상에 버려진 느낌을 느끼게 하는 외로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실수하거나 죄책감에 빠져서 불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린 아이의 애틋한 감성이 깃들인 “아빠”라고 부르는 “아버지”라는 말에서 시작하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감추지 않으십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아마도 누군가는 자신 안에 나쁜 것들을 가지고 있고, 해결 방법을 모를 수도 있으며, 이런 저런 짓을 한 것에 대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얼굴을 숨기시지 않으시며, 침묵하고 있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하고 말하십시오. 그분께서 대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네, 그렇긴 하지만 저는 죄인입니다. (…)” 그럴지라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여러분을 잊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침묵 중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다. (…)”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그곳에 있었으며, 너와 가까이에 있었으며, 너를 향한 나의 사랑에 충실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16 1월 2019, 1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