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역사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오로 6세 홀에서 진행된 새해 첫 번째 일반알현을 통해 “복음의 혁신”을 강조하면서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을 재개했다. 교황은 산상 설교를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  3. 산상수훈의 중심에 있는 기도

“역사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며칠 전에 지낸 성탄의 신비에 비추어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을 계속 이어갑시다.

마태오 복음은 “주님의 기도”를 전략적인 지점에 놓습니다. 곧, 산상수훈의 중심에 위치시킵니다(마태 6,9-13 참조). 우선 그 장면부터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근처의 언덕으로 올라 앉으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그분의 가장 친밀한 제자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이질적인 무리가 처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받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산상수훈 안에 “주님의 기도”가 배치된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마태 5,1-7,27 참조)라고 불리는 이 긴 가르침 안에 당신 메시지의 근본적인 측면을 압축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 선언에 대한 말씀은 마치 파티를 꾸미는 장식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오늘날에도 마친가지입니다만, 관심을 끌지 못하는 범주에 속한 사람들에게 행복의 면류관을 씌우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 이것이 복음의 혁신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혁신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복음은 혁신적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렸지만, 사랑할 수 있고 평화를 건설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마음에 품고 계시는 여러분,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분께서는 사랑과 용서 안에서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십니다.”

역사의 가치들을 뒤집은 이 출입구에서 복음의 새로움이 나옵니다. 율법은 폐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원래 율법의 의미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는 하느님의 모든 말씀이 마지막 결과에 이르기까지 육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자신의 배우자와 친구와 심지어 원수 까지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산상설교 전체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마태오 복음의 이 장들이 윤리적인 가르침처럼 보이고, 실천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엄격한 윤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신학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타는 떨기 나무’ 앞에서 머무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름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녀들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새롭게 하시길 원하시고, 선에 목말라하며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이 세상을 향해, 당신의 선의 광채를 묵상하길 원하시는, 그러한 하느님의 계시 앞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소개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두 그룹들 간의 거리를 언급하면서 시작하십니다. 먼저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마태 6,6) 위선자들의 그룹이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무신론자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잘 나가고, 하루 종일 교회에서 활동하거나 매일 교회에 나가지만,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거나 뒷담화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스캔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스캔들입니다! 그럴 바에는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산다면 여러분은 무신론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교회에 간다면, 아들처럼 형제처럼 살고, 스캔들이 아닌 진정한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아버지와의 지속적인 대화와 깊게 연결된 자신의 양심과 다른 그 어떤 믿을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기도와도 거리를 두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태 6,7).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많은 고대 기도의 필수 전제인 “선의의 승리(captatio benevolentiae, 청중의 선의를 사로잡는 수사학 기법)”를 암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곧, 신이 일련의 긴 찬양과 기도에 어느 정도는 길들여져야 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의 사제들에게 도전하는 장면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소리쳤고, 춤추고, 자신들의 신이 귀를 기울이도록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침묵했고,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교도들은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도, 이런 표현을 쓰는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만, “앵무새처럼 하느님께 말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으로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마음에서, 내면에서 이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청하는 것처럼,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6,8 참조). “주님의 기도”는 침묵의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 아래 두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기도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하느님께 있어서, 당신의 은총을 얻기 위해 우리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기도할 때 단지 우리가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인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가 당신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열어 두길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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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알현
02 1월 2019, 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