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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려고 세상의 무대에 오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여정을 시작해야 하며, 선택의 길을, 그분의 길을, 겸손한 사랑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6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집전한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 강론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교황은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게 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번역 이창욱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는 말은 주님의 드러내심을 가리킵니다. 성 바오로가 제2독서에서 말하고 있듯이(에페 3,5 참조), 주님께서는 오늘 동방 박사들에 의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위해 오신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현실이 계시된 겁니다. 다시 말해, 모든 나라, 모든 언어, 모든 백성이 그분에게 받아들여졌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일에 대한 상징은 모든 이에게 도달되는 빛, (그들을) 비추는 빛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모든 이들에게 드러내셨지만, 그분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여전히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드러나시면서, 복음은 헤로데 임금의 왕궁 주변을 오가는 길을 소개합니다. 곧,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찾게 되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왕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누추한 거처에서 (그분을) 찾았습니다. 이와 똑같은 역설이 성탄절에도 나타났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 시대에, 온 세상이 호적등록을 하게 될 때였습니다(루카 2,2 참조). 그렇지만 당시 권력자들 중 그 누구도 역사적인 왕이 자기 시대에 탄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세례자 요한이 앞서 길을 닦은 다음, 예수님께서 서른 살쯤 되셔서 공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셨을 때, 복음은 세속적인 권력에서나 정신적인 권력에서나 당대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역사적 맥락에서 또 다른 장엄한 공현을 보여줍니다. 곧, 티베리우스 황제, (유다 총독) 본시오 빌라도,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와 (그의 동생 헤로데) 필리포스, (아빌레네의 영주) 리사니아스, 한나스와 카야파 대사제가 활동하던 때였습니다(루카 3,1-2 참조). 그리고 이렇게 끝맺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2).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은) 위대한 인물들 중 그 누구에게도 내리지 않았지만, 광야에서 은둔하고 있던 한 사람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놀라움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려고 세상의 무대에 오르시지 않았습니다.

유명 인사들의 목록을 들으면서, 그들에게 “빛을 비추려는”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별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상을 지배했던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 위에 나타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로마제국 전체가 금세 그리스도인이 되었겠지요. 혹은 (그 빛이) 헤로데 왕궁을 비추었다면, 헤로데 왕이 악을 저지르는 대신 선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빛은 자기 자신의 빛을 비추려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시며, 당신 자신을 제안하십니다. 빛을 비추시지만, 현혹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빛을 세상의 빛과 혼동하는 큰 유혹이 항상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권력과 무대의 매혹적인 빛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복음에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처럼 잘못된 부분에 빛을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다정한 빛은 겸손한 사랑 안에서 빛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교회로서 우리가, 우리의 빛을 발산하려고 바둥거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태양이 아닙니다. 우리는 달에 불과합니다. 비록 그늘을 지니고 있지만, 참된 빛이신 주님을 반영합니다. 교회는 달의 신비(mysterium lunae)입니다. 주님이신 그분이야말로 세상의 빛이십니다(요한 9.5 참조). 그분께서 우리의 빛이십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빛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비춥니다. 제1독서(이사 60,2 참조)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빛이 땅을 뒤덮고 있는 어둠과 암흑으로 가려지지 않고, 그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빛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떠올려줍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이사 60,1)며 우리 각자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앉아있는 곳에서 일어나 걸어갈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헤로데의 질문을 받았던 율법학자들처럼 멈춰 서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매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상 옷이 되실 때까지, 빛이신 하느님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빛처럼 소박한 하느님을 입기 위해서는, 우선 화려한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빛보다 성공과 권력의 지상 빛을 더 좋아했던 헤로데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동방 박사들은 예언을 실현시켰습니다. 빛을 입으려고 일어섰습니다. 오직 그들만이 하늘에서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율법학자들도,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는 그 누구도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여정을 시작해야 하며, 선택의 길을, 그분의 길을, (그분의) 겸손한 사랑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만났던 동방 박사들이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헤로데가 지시했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 또 다른 길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곧 마리아와 요셉과 목동들이 성탄 때 걸어갔던 길처럼, 세상과는 다른 길입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거처를 버리고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여정을 계속 하기 위해 세속적인 집착을 버리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이 어디서 탄생하셨는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도달해야 합니다. 헤로데처럼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 계신 곳이 우리의 자리가 될 때, 그분의 때가 우리의 때가 될 때, 그분의 인격이 우리의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예언은 우리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탄생하시고 우리를 위해 살아계신 하느님이 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동방 박사들을 본받으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논쟁하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게다가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중심이신 그분의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중심이신 그분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들의 계획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선택할 태도도 갖추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 주님을 향한 근본적인 열림, 그분을 향한 전적인 투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년시절부터 예수님이 벌써 말씀하셨던 것과 동일한 언어, 그 사랑의 언어를 그분과 함께 사용합니다. 사실 동방 박사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성탄 때 우리는 그분의 축일을 위해, 예수님께 약간의 선물을 가져갔습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끼리만 선물을 주고받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빈손으로 주님께 갔다면, 오늘 만회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실, 말하자면 작은 선물-리스트를 말해줍니다.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아주 귀한 물건으로 여겨졌던 황금이 첫 번째 선물로 하느님께 바쳐진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느님을 경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첫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없앨 필요가 있고,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어야 하며, 자기중심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 선물은 주님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유향입니다. 유향, 곧 기도는, 하느님께 올라가는 분향 같은 것입니다(시편 141,2 참조). 하지만 향기를 풍기기 위해 유향이 태워져야 하는 것처럼, 기도를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을 “불태우고”, 주님을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참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인) 몰약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을 다해 (아마포로) 감싸기 위해 사용된 기름이었습니다(요한 19,39 참조).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겪은 육체, 가장 연약한 살갗, 뒤쳐진 사람, 물질적인 보상을 전혀 주지 않으면서 오로지 받기만 하는 (연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에 기뻐하십니다.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향한 자비, 거저 베푸는 무상이 하느님의 눈에는 소중합니다! 거저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 귀합니다. 막바지에 이른 성탄 시기 동안, 세상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빛나는 가난 안에서 모두를 위해 오신, 우리의 임금님께 멋진 선물을 바칠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분의 빛은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06 1월 2019,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