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성모님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평화의 모후를 우리 삶 안에 영접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 중에 동정 마리아 덕분에 “하느님께서 인류와 영원히 연결됐다”고 강조했다. 마리아의 눈길은 미지근함의 벽 앞에서 “부드러움이 신앙에 있어서 근본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떠올려주며, 마리아의 포옹은 고독을 없애고, 마리아의 손길은 선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번역 김호열 신부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루카 2,18). 성탄 팔일 축제가 끝나는 오늘 우리는, 모든 것에 가난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부자이신, 우리를 위해 탄생하신 아기 위에 우리의 눈길을 두면서, 놀라워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놀라움은 새해가 시작되는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밑바닥 상황에서도 항상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앞에서 놀라워해야 하는 날입니다. 자신의 창조주를 양육하는 한 여인의 품 안에서 하느님은 작은 아이입니다. 우리 앞에 모셔져 있는 이 성상은 마치 어머니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일치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끝없는 놀라움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오늘 축일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은 인류와 영원히 연결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영원히 함께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초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은 혼자 하늘에 살면서 멀리 있는 주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우리 각자의 형제가 되시기 위해, 우리 가까이에 계시기 위해, 우리들처럼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가까이에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어머니이시며 또한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무릎 위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온 인류에게 새로운 애정을 보내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에 대한 믿음을 그치지 않으며 모르는 체 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같은, 부성적이며 모성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세상과는 다르게, 우리들의 실수나 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이자 탁월한 당신 어머니에게서 드러난 인류를 믿으십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경이로움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마리아께 전구합시다. 우리 안에서 믿음이 생겨났을 그때의 놀라움을 새롭게 합시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주님을 낳으신 어머니께서 우리 안에 주님을 낳으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어머니이시고, 자녀들 안에 신앙의 놀라움을 새롭게 생겨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움 없는 삶은 온통 회색이며, 습관적인 것이 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또한 교회 역시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며, 자녀들을 낳는 어머니라는 놀라움을 갱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를 전시해 놓은 아름다운 박물관과 비슷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박물관 교회(Chiesa museo)”가 될 위험입니다. 반면, 마리아께서는 가정의 분위기를, 새로움의 하느님께서 현존해 계시는 가정의 분위기를 교회에 가져다 주십니다. (에페소) 공의회 당시 에페소에 살았던 신자들처럼, 놀라움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의 신비를 영접합시다. 그들처럼 “천주의 성모님(Santa Madre di Dio)”이라고 외칩시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우리의 손을 잡으실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맡깁시다.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내어 맡깁시다. 특히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복잡한 삶의 매듭에 (우리가) 얽혀 있음을 발견 할 때, 성모님께서 우리를 바라 보시도록 합시다.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마리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바라 보실 때는,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자녀들을 바라 보십니다. 눈은 영혼의 거울이라고들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의 눈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며, 우리에게 천국을 반영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몸의 등불”(마태 6,2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눈은 모든 어둠을 비추고, 모든 곳에서 희망을 다시 켜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용기를 내어라. 너희들의 엄마인 내가 있단다!”

신뢰를 심어주는 이 모성적인 시선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도와 줍니다. 신앙은 (인간의) 온 인격을 포함한 하느님과의 유대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모성적인 시선은 하느님을 믿는 백성들 안에서 자신이 사랑 받는 자녀라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의 한계와 서로의 목표를 넘어 서로를 사랑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름보다는 일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 안에 뿌리내리게 하시며,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고 채근하십니다. 마리아의 시선은, 미지근함의 장벽 앞에서, 부드러움은 신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떠올려줍니다. 애틋한 사랑(Tenerezza)입니다. 애틋한 사랑의 교회(la Chiesa della tenerezza)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애틋한 사랑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를 믿는 신앙이 존재할 때라야, 신앙의 중심인 주님을 우리는 결코 잃어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께서는 또한 형제들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어머니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시선은 어머니들의 시선입니다. 모성적 시선 없이 미래를 바라보는 세상은 근시안적인 세상입니다. 예언자들은 늘어나겠지만, 사람들 안에서 자녀들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익은 있겠지만,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같은 집에서 살지만, 형제들로서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인류 가족은 어머니를 기반으로 합니다. 모성적 사랑 안에서, 단순히 감정과 연결된 세상은 물질적으로는 부유하겠지만, 미래는 부유하지 않습니다. 천주의 성모님, 삶에 대한 당신의 시선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와 우리들의 비천함에 당신의 시선을 보내소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눈빛을 우리에게로 돌리소서.

우리를 감싸 안으시도록 내어 맡깁시다. 시선에 대해 말한 다음에는 마음이 등장합니다. 마음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담으시고, 좋은 일이나 그렇지 않은 모든 일을 받아 들이셨습니다. 모든 것을 묵상하셨으며, 하느님께로 가지고 가셨습니다. 여기에 그분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 각자의 삶에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모든 상황들을 받아들이시고, 그것들을 하느님께 바치길 원하십니다

기준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는 오늘날 일관성 없는 삶 속에서 성모님의 포옹은 필수적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흐트러짐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더욱 더 분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성모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모님께서는 많은 구체적인 상황을 받아 들이셨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계셨습니다.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 가셨으며, 카나의 신랑 신부를 도우셨으며, 다락방의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 마리아는 외로움과 흩어짐을 위한 치료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위로의 어머니이십니다. 홀로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분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말 만으로는 위로하는 것이 부족하며 함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곳에 어머니로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포옹하도록 우리를 내어 맡깁시다. 성모 찬송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여왕이시여)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vita nostra)”으로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과장되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참조). 하지만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와 너무 일치되어 계시고, 우리와도 가까이 계시기에, 마리아의 손 안에 우리의 생명을 두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며, 그분을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삶의 여정 안에서 우리의 손을 잡으시게 내어 드립시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손을 잡고, 사랑을 가지고 자녀들을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홀로 걸어가면서 목표를 잃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자신들이 강하다고 느끼지만,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노예가 되고 맙니다. 많은 자녀들이 모성적 애정을 잃어버리고, 스스로에게 화내며 살고 있으며,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살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많은 자녀들이 모두와 모든 것에 표독스럽게 악의적으로 대응합니다. 자녀들의 삶이 이렇습니다. 때로는 강한 체 하려고 자신을 나쁘게 나타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약한 모습일 뿐입니다. (참된) 영웅주의는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자비를 가지는 것이 강한 모습입니다. 온유함 안에 지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머니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 없이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필요로 하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냥 평범한 순간이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주셨습니다. (가장 사랑한)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모님은 선택사항(optional)이 아닙니다. 우리 삶 안에 받아 들여야 합니다. 악을 이기시고, 선의 길로 인도하시며, 자녀들 사이의 일치를 가져다 주시고, 자비심을 가르치시는 평화의 모후이십니다.  

성모님, 저희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당신의 붙잡아주심으로써 우리는 가장 힘든 굴곡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묶어 주는 유대를 다시 발견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당신의 망토 아래 우리를 모으시고, 인류 가정이 새롭게 생겨 나는 곳인 당신의 진정한 사랑의 애틋함 속에서 우리를 함께 모으소서.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 하에 우리는 피난처를 찾습니다(Sotto la tua protezione cerchiamo rifugio, Santa Madre di Dio).” 모두 함께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 하에 우리는 피난처를 찾습니다.”

01 1월 2019,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