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Vatican Media)

감옥에 갇힌 이들 위한 교황의 기도… 감춰진 빈민을 생각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에서 교정시설 과밀화의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며 다시금 책임자들이 해결책을 강구하도록 기도하자고 초대했다. 교황은 강론을 통해 정치 경제적 불의의 희생자들, 곧 가난한 이들을 언급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에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로 심판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Vatican News / 번역 이창욱

프란치스코 교황은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4월 6일 성주간 월요일 아침미사를 봉헌했다. 교황은 이날 교도소의 과밀 문제를 위해 기도했다.

“저는 세계 곳곳에 산재한 중대한 문제를 생각합니다. 오늘은 교도소의 과밀화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자 합니다. 코로나 19 판데믹의 시기에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인 초만원의 상태는 매우 위험하며, 심각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바르고 창의적인 방법을 찾도록 말입니다.”

교황은 강론에서 요한복음의 대목(요한 12,1-11 참조)을 해설했다. 이날 복음은 라자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비판을 초래했다. 그는 주님을 배신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면서,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 복음사가는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며, 돈주머니를 담당하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했다고 설명했다(요한 12,6 참조).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여기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언급했다. “가난한 이들은 많습니다. 대부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수많은 가난한 이들은 세계 경제의 불의한 구조와 재정정책의 희생자들입니다. 많은 가난한 이들은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처지를 부끄러워하며 남몰래 자선단체(카리타스)를 찾아갑니다. 우리는 최후심판에서 가난한 이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다음은 교황의 강론 내용.

“오늘 복음은 이러한 관찰로 마무리됩니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2,10-11). 며칠 전 우리는 (그분을 죽이려는) 유혹의 진행과정을 살펴 보았습니다. 부추김으로 시작해서 그러한 유혹이 커지면 두 번째 단계에서 망상이 되고,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주변을 전염시키고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다른 과정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멈추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이제는 라자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그가 생명의 증인이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잠시 머물며 묵상하고 싶습니다.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우리 역시 주님 수난의 문턱에 와 있을 때, 마리아가 관상의 행위를 보여주었습니다. 곧, 마르타는 한편으로 시중을 들고 있었고, 마리아는 관상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돈을 생각합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한다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에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했습니다(요한 12,6 참조). 정직하지 못한 관리자에 대한 이 이야기는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언제나 있어 왔고, 또 고단수입니다. 수많은, 아주 많은 직원을 둔 자선단체나 인도주의 단체를 생각해봅시다.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를 통해서는 (후원금의) 40퍼센트만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갑니다. 나머지 60퍼센트는 단체의 많은 관계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쓰이기 때문이죠. 이는 가난한 이들의 돈을 가로채는 방식입니다. 제가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여기, 예수님의 그 대답입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요한 12,8). 이는 사실입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아주 많죠. 우리 눈에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보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감춰진 빈민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관심의 문화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죠. 무관심의 문화는 부정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부정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보이지 않잖아요. 물론 있기는 하겠죠. (...)’ 항상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축소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많습니다. 매우 많죠.”

“물론, 비록 이러한 무관심의 문화에 들어가 있지 않다 해도, 가난한 이들을 마치 도시의 장식품처럼 바라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죠. 저기 조각상처럼 말이죠.’ ‘네, 있습니다. 거기 가면 볼 수 있죠.’ ‘물론이죠. 자선을 구걸하는 그 할머니 말이죠. 그리고 이런저런 사람도 있죠. (...)’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이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마치 도시 장식의 일부처럼 되었죠.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대다수는 경제정책이나 재정정책의 희생자들입니다. 최근 통계자료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돈을 소유한 이는 소수에 불과하고, 많은 이들은 너무 많은 가난을 겪는다’고요.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는 많은 이들의 가난이 세계 경제의 불의한 구조로 희생됐음을 뜻합니다.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처지를 부끄러워하는 많은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중산층의 많은 가난한 이들은 남몰래 자선단체를 찾아가 숨어서 돈을 청하며 부끄러워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부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아주 많고, 많습니다. (...)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사실입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 하지만 ‘나는 가난한 이들을 보고 있는가? 나는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무엇보다 생계를 꾸리지 못한다고 말하길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이 감춰진 현실을, 나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년 동안 비어있던 건물, 방치된 공장의 건물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열 다섯 가구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 갔었습니다. 아이들이 딸린 가족들이 버려진 공간의 각 구역을 거처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들을 살펴보면서, 저는 모든 가정이 좋은 가구를 갖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산층이 소유하고 있을 만한 가구들이었죠. 그들은 텔레비전도 있었지만,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어서 빈 공장으로 갔던 겁니다. 집세를 낼 수 없어서 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신흥 빈민들입니다. 그들은 그런 곳을 찾아갑니다. 그들을 그렇게 이끈 것은 경제조직 혹은 재정정책의 불의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심판 때 이들을 만나게 될 순간이 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첫 번째 질문으로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지냈느냐? 먹을 것을 주었느냐?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방문했느냐?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방문했느냐? 과부와 고아를 도와줬느냐? 왜냐하면 그곳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심판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여행이나 사치스러운 생활 혹은 우리의 사회적 중요성으로 심판 받는 게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오늘, 내가 가난한 이들을 모른 체한다면, 그들을 한쪽으로 제쳐둔다면,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없다고 믿는다면, 주님이 심판의 날에 나를 모른다고 하실 겁니다. 예수님이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의미는, ‘나는 항상 가난한 이들 안에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공산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분명 이 기준대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미사를 마친 다음 교황이 성령께 봉헌된 산타 마르타의 집 성당에서 퇴장할 때, 미사 참례자들이 함께 오래된 성모 찬송가인 ‘하늘의 모후여, 기뻐하소서!(Ave Regina dei Cieli)’를 노래했다.

하늘의 영원한 여왕, 천사의 모후, 기뻐하소서.

당신은 이새의 뿌리, 세상의 빛 낳으신 이.

복되어라, 하늘의 문, 영화로운 동정녀여,

찬미하는 우리 위해 아드님께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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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4월 202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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