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Vatican Media)

“연민은 하느님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연민은 현실 차원을 깨닫게 해주는 “마음의 안경”이고, 하느님의 언어이기도 하다. 반면 많은 경우 인간의 언어는 무관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17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교황은 여름 휴식 동안 중단했던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를 지난 9월 16일부터 재개했다.

Debora Donnini / 번역 이창욱

“연민(compassione, 동정(심), 가엾은 마음)에 마음을 열고 무관심으로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17일 화요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이같이 강하게 권고했다. 사실 연민은 우리 스스로 갇히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참된 정의”의 길로 이끈다. 교황은 이날 전례에 나오는 루카 복음의 구절(루카 7,11-17)에서 묵상을 시작했다. 해당 복음은 무덤으로 향하던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나인 고을의 과부를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장면을 들려준다.

우리의 하느님은 연민의 하느님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그냥 가엾은 마음(compassione)이 드신 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엄청난) 가엾은 마음(grande compassione)이 드시어”(루카 7,13)라고 표현했던 점을 교황은 주목했다. 그것은 마치 “연민에 사로잡히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분을 따랐던 군중이 있었고, 그 여인을 동행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현실을 직시하셨다. 곧 그녀는 홀로 남았고, 과부였으며, 외아들을 잃었던 사람이다. 사실 연민이야말로 현실을 깊이 깨닫게 해준다.

“연민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게 해줍니다. 연민은 마음의 안경 같은 겁니다. 현실 차원을 정말로 깨닫게 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차례 연민에 사로잡히십니다. 연민은 하느님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연민은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다’(탈출 3,7)고 말씀하신 하느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백성을 구원하라고 모세를 파견하신 것도 하느님의 연민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연민의 하느님이시고, 말하자면, 연민은 하느님의 약함이지만, 동시에 그분의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성자를 파견하도록 그분을 움직이게 한 것도 바로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연민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연민은 예를 들어 길에서 개 한 마리가 죽어 가는 것을 볼 때, “불쌍한 것, 우리 마음이 약간 아프네”라고 느끼는 “고통의 감정이 아니”라고 교황은 설명했다. 반면, 연민은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그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주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그곳으로 가신다.

“무관심”이라는 모습

교황은 제자들이 군중을 해산하려 하자, 예수님께서 그분을 따랐던 수많은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며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소개하는 복음 장면에서 또 다른 사례를 들었다. “제자들은 현명했습니다.” 교황은 이점에 주목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대답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화가 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힘든 하루를 보낸 다음 빵을 사러 마을에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었다. 교황은 “주님께서는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아 보였기 때문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복음은 말한다”(마르 6,34 참조)고 강조했다. 따라서 한편에는 연민을 가진 예수님의 태도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하며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자신들은) 개입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는” 제자들의 이기적인 태도가 있다.

“바로 여기서, 연민이 하느님의 언어라면, 인간의 언어는 많은 경우 무관심입니다. 거기까지만 책임을 지고 더 이상은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겁니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나온 사진들 중 하나는, 지금은 교황자선소에 걸려있는 사진입니다만, ‘무관심’이라고 불리는 사진입니다. 지난 번 제가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겨울 밤, 화려한 고급 레스토랑 앞에, 한 여성 노숙자가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잘 차려 입은 어떤 부인에게 손을 내밀자 그 부인이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이것이 무관심입니다. 그 사진을 한 번 보러 가십시오. 그것이 무관심입니다. 우리의 무관심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다른 위치에서 (상대방을) 바라봅니까 (...) 이와 같이 우리는 연민에 문을 닫아겁니다. 양심성찰을 해봅시다. 나는 습관적으로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성령께서 연민의 거리로 나를 이끄시도록 맡겨드리는가? 연민은 하느님의 덕목입니다. (...)”

돌려주는 것이 무관심에서 우리를 구해줍니다

교황은 이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 죽은 아들의 어머니에게 “울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 감동했다고 말하며 “연민의 어루만짐”이라고 강조했다.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그 젊은이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젊은이는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바로 이 대목에 주목했다. “주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루카 7,15 참조).

“그를 돌려주셨습니다. ‘정의’의 실천입니다. 이 단어는 법조계에서 사용됩니다. 곧 ‘돌려주는 것’입니다. 연민은 우리를 참된 정의의 길로 이끕니다. 어떤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항상 권리를 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이기주의, 무관심, 우리 스스로 갇히는 것에서 우리를 구해줍니다. ‘주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라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 미사를 이어갑시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도 가엾은 마음이 들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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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9월 201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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